선조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작성자 운봉(雲峰)
작성일 2017-09-11 (월)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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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이씨의 관향(貫鄕)과 유래(由來)

몇개월 째 연제를 미뤄오댜 뜻밖에 황당한 일을 접하게 되어 연제에 앞서 우리 부평이씨의 관향과 유래를 상세하게 일깨워드리는 것이 시급한 상항이라 사료되어 연제에 대신합니다.

몇일전 어는 모임에서 종친회 회합에 몇차래씩이나 참서하는 분께서 우리 부평이씨이 관향과 유래에 대해 동문 서답을 하시는 것을 듣고 너무 충격적이라 이런 분이 또 계시면 어쩌나하는 노파심에서 이번 시간에는 우리 부평이씨의 유래와 관향에 대해서 상새하게 설명드리고저 합니다.

우리 부평이씨(富平李氏:교려초에는 樹州李氏)는 본시 신라 말에 장제군(長堤郡:김포반도)에 위치한 계양산에 본거지를 두고 옛 수안(水安).동성(童城).통진(通津).김포(金浦)등 네 개의 현을 통치한 호족 군장(豪族君長)이신 이희목(李希穆)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당시 신라는 전성기를 지나 진성여왕 이후 계속 국운은 기울어져 행정력이 지방에 까지 미치지 못하자 전국의 지방 고을은 군웅할거지(群雄割據地)로 변했다. 이때 태조 왕건(太祖王建)은 송경에서 가장 가까운 요충지인 김포반도에 위치한 장제군의 호족군장인 이희목(李希穆)에게 높은 벼슬을 주고 고려왕조 창업에 협조할 것을 회유하여 그대로 장제군을 다스리게 하니 이에 귀부(歸附)하여 김포 부평 인천 양천 부천 일대를 아우르는 대 호족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공으로 태조는 공에게 고려개국벽상국공신(高麗開國壁上功臣)에 책봉하고 삼중대광 태사(三重大匡太師) 태사(太師)에 벼슬을 내렸다. 시호는 충민(忠敏)이다.

시조 충민공의 증손인 문충공(文忠公) 휘 이정공(李靖恭)과 현손인 장숙공(壯肅公) 휘 이위(李瑋)께서 부자분이 이어서 일인지하 만인지상 (一人之下 萬人之上)인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시고 문총공 이정공께서는 부평백(富平伯)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관향을 부평이씨로 하는 계기가 되었다.

940(태조23) 3월에 지방제도를 개혁하여 경주(慶州)를 대도독부(都督大府)로하고 전국의 지명을 규모와 중요성에 따라 주(). (). (). ()으로 개칭할 때 이희목(李希穆)의 세력 기반인 장제군(長堤郡)수주(樹州)로 승격시켜 개경근교(開京近郊)에 웅읍(雄邑)으로 삼았다. 이로서 우리 부평이씨가 고려초에 수주이씨(樹州李氏)가 된 계기가 되었다.

일부 계양이씨(桂陽李氏)로 관향이 되어있는 경우는 장숙공 이위께서 계양백(桂陽伯)에 봉해지면서 부평의 지명이 계양(桂陽)으로 바뀜과 동시에 일부 종친들이 계양이씨(桂陽李氏)로 호적에 올린 것이다. 예를 들면 인천에 본관을 둔 인천이씨는 당초(當初) 고려시대에 인천의 고호가 경원(慶源)임으로 경원이씨로 소성(邵城)으로 개명되면서 소성이씨로 인주(仁州)로 개명되면서 인주이씨로 인천으로 개명되면서 인천이씨(仁川李氏)로 지명이 개명됨에 따리 본관을 바꾼 경우와 같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부평이씨의 관향(貫鄕) : 본관소재지 인천광역시 부평(富平)은 조선시대에 설치되었던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의 동남부지역이었다. 백제와 고구려 때에는 주부토군(主夫吐郡)이라 불리었다가 757(신라 경덕왕 16)에 장제군(長堤郡)으로 개칭되어 한주(漢州: 廣州) 관하에 있었으며, 영현으로 통진(通津: 分津김포(金浦동성(童城수안(水安:戌城) 4개현을 관할하였다. 940(태조23) 3월 지방제도를 개혁하여 경주를 대도독부(大都督府)로 하고 전국의 지명을 주(). (). (). ()으로 개칭할 때 장제군(長堤郡)수주(樹州)로 승격시켜 개경(開京) 근교에 웅읍(雄邑)이 되었다.

995(성종 14)에 단련사를 파견하였다가 1005년에 혁파하였다. 1018(현종 9)에 주로 승격하였다가 1150(의종 4)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개칭하였고, 금천(衿川동성(童城통진(通津공암(孔巖김포(金浦수안(守安) 등을 속현으로 포함하여 넓은 면적을 관할하였다. 1215(고종 2)에는 이곳 계양산의 이름을 따서 계양도호부(桂都護府)로 개칭했으며, 1308(충렬왕 34)에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되었다가, 1310(충선왕2)에 다시 부평부로 강등되었다. 1413(태종 13)에 다시 부평도호부가 되었다. 1895(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인천부 부평군이 되었으며, 1896년 경기도 부평군이 되었다. 1914년 군부(郡府) 폐합 령에 따라 넓은 지역이 인천부(仁川府)에 속하게 되었고, 나머지 지역과 주변의 일부지역을 합쳐서 부천군으로 발족하였다. 1973년 부천군이 폐지되면서 소사읍을 중심으로 한 부천시로 승격하였다.

부평군은 인천광역시 부평구가 되었다가 계양구로 분구되었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이르기를 수주(樹州)를 가리켜서 남쪽은 남양(南陽)과 닿았으며 북쪽은 김포와 연해있고 동쪽은 시흥과 접했으며 서쪽은 큰 바다가 있으며 부평구읍(富平舊邑) 서북쪽 일리(一里)거리에 계양산(桂陽山)이 있는데 둘레가 수십 리라 기록되어있다.

사료(史料)에 보면 수주(樹州)의 도호부가 지금에 오류동에 위치했으며 1018(현종9)에는 당시 소성(邵城)인 인천(仁川)까지 수주(樹州)에 속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수주의 넓은 면적을 가늠케 한다. 특히 오세조가 되시는 문하시중(門下侍中)과 중서령(中書令)을 지내신 휘 이위(李瑋) 장숙공(壯肅公)께서 진정공신(鎭定功臣)의 호와 함께 식읍(食邑) 이천오백 호에 식실봉(食實封) 오백호를 하사 받으셨으니 그 당시 수주의 가구 수가 만여 호에 가깝지 않았나!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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