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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2-11-07 (수)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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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19世 諱 世華-02)
이조실록 중에서

顯改 26卷, 14年(1673 癸丑 / 청 강희(康熙) 12年) 2月 30日(庚午) 2번째기사
이완이 이세화의 직책에 대해 아뢰다
○守禦使李浣請對, 上引見于養心閤。 浣曰: “前廣州府尹李世華, 自奉簡約, 且有牧民治兵之才。 如此之人, 不可不久任責成, 而頃日政, 移拜慶尙監司, 誠可惜矣。 且方有城堞修築之役, 臣老病, 不能躬往監董, 又失此人, 則前頭經理之事, 尤極可慮。 方伯異於庶官, 雖不敢直請仍任, 而保障之地, 亦甚關重, 請詢于廟堂而變通。” 上曰: “嶺南地大難治, 故移授矣。 時未赴任, 而保障亦重, 李世華仍任廣州府尹。” 浣曰: “鳥嶺在忠州、聞慶之間, 控扼南路, 形勢極其險峻。 中有御留城, 可設關防, 而李時昉設立分軍之規, 以忠州軍卒屬之於南漢, 不使防守鳥嶺, 是豈遠慮也哉? 今以南漢所屬忠州軍三千九百名, 割給而守之, 則緩急豈不得力乎?” 上曰: “今除出忠州軍卒, 則其代, 將何以充之乎?” 浣曰: “守城必以本土之民, 然後可得死守。 聞李世華之言, 本州民戶八千九百有餘, 可得兵萬人云, 此足以守之矣。” 上曰: “更與廣尹料理後, 與備局同議稟處可也。”
수어사 이완이 청대하니 상이 양심합에서 인견하였다. 이완이 아뢰기를,
“전 광주 부윤(廣州府尹) 이세화(李世華)는 검약한 생활을 하는데다 백성을 기르고 군사를 다스리는 재능이 있으니, 이런 사람은 오래도록 그 직책에 두어 공을 이루도록 책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일 정사(政事)에서 그를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옮겨 임명했으니 정말 애석합니다. 그리고 현재 성첩(城堞)을 수축하는 공사를 진행 중인데 신은 늙고 병들어 직접 가서 감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또 이 사람을 잃게 되면 앞으로 경리(經理)할 일이 더욱 염려스럽기만 합니다. 방백은 일반 관원과 달라서 감히 곧바로 잉임(仍任)시키기를 청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 역시 매우 중대한 관계가 있으니, 묘당에 자문하시어 변통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남은 지역이 넓고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기 때문에 옮겨 제수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 부임하지 않았고 보장이 되는 지역도 중하니 이세화를 광주 부윤에 잉임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완이 아뢰기를,
“조령(鳥嶺)은 충주(忠州)와 문경(聞慶) 사이에 위치하여 남로(南路)를 제압하고 있으며 형세가 지극히 험준한데 그 속에 어류성(御留城)이 있으니 관방(關防)을 설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시방(李時昉)이 군사를 나누는 규정을 설립하여 충주의 군졸을 남한 산성에 소속시키고 조령은 막아 지키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 어찌 생각이 깊다고 하겠습니까. 지금 남한 산성에 소속된 충주의 군졸 3천 9백 명을 그곳에 떼주어 지키게 한다면 위급할 때 어찌 힘을 얻지 못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충주의 군졸을 덜어내면 그 대신을 어떻게 보충하려 하는가?”
하자, 이완이 아뢰기를,
“성을 지킬 때는 반드시 본토 백성을 동원해야만 사수할 수 있는 법입니다. 이세화의 말을 듣건대, 본주(本州)의 민호(民戶)가 8천 9백여 호로서 군사 1만 명은 얻을 수 있다고 하니, 이 정도면 충분히 지킬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시 광주 부윤과 요리한 뒤에 비국과 함께 의논해서 품처토록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8책 139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국왕(國王) / *인사-임면(任免)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지방군(地方軍)

이완 [李浣] 1602(선조 35)~ 1674(현종 15).
조선 후기의 무신.
개요
효종 때 북벌계획에 깊이 관여하면서 군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 본관은 경주. 자는 징지(澄之), 호는 매죽헌(梅竹軒).
인조대의 활동
아버지는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진 판서 수일(守一)이다.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한 뒤 이서(李曙)의 추천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가 되었다. 이어 1627년 영유현령, 1629년 상원군수, 1630년 숙천부사를 거쳐 1631년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별장(別將)으로 출전하여 정방산성(正方山城)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다. 1638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최명길(崔鳴吉)의 추천으로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1640년 청나라가 명을 치면서 전선(戰船) 120척과 공미(貢米) 1만 포(包)를 요구해왔을 때, 임경업(林慶業)의 부장(副將)으로 출전했다. 그러나 고의로 배를 파손하고 풍파를 만난 것처럼 꾸며 청에 피해를 과장하여 알리는 한편, 명나라에 출전 사실을 알려 충돌을 피했다. 그뒤 양주목사를 거쳐 경기도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공청도(公淸道) 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북벌계획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명에 대한 은혜를 갚고, 청에게 받은 치욕을 씻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북벌을 계획하고 군비확충책을 펼침에 따라 북벌과 관련된 요직을 두루 맡게 되었다. 1650년(효종 1) 우포도대장에 기용된 것을 시작으로 잠시 한성우윤으로 옮겼다가, 곧 1652년 북벌을 위한 본영(本營)으로 삼은 어영청의 어영대장이 되었다. 이때 어영청의 군안(軍案)을 바꾸어 어영청에 소속된 원군(元軍)을 2만 여 명으로 대폭 확대하고, 이들에게 지급되던 군보(軍保)도 종전 1보(保)에서 3보로 늘려 8만 여 명의 군보를 확보하는 한편, 안산 덕물도(德勿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했다. 1653년에는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추천으로 종래 훈척(勳戚)만이 임명되던 훈련대장에 뽑혔다. 훈련대장으로 있으면서 해이해진 군기(軍紀)를 확립하고, 신무기의 제조, 성곽의 개수와 신축 등 북벌계획과 관련된 대책을 효종에게 건의했다. 그뒤 한성부판윤·공조판서·형조판서 등도 지냈다. 1659년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국가재정의 고갈과 군역(軍役)을 져야 하는 양인 피역(避役)의 증가 때문에 북벌논의가 후퇴했으나 훈련대장·포도대장 등에 계속 재임했다. 1667년(현종 8) 급료병(給料兵) 체제의 유지가 힘들게 되면서 양역변통(良役變通)의 논의가 활발해지고, 효종 때 과다하게 책정된 군액(軍額)을 축소하는 방법으로 훈련도감을 없애자는 논의가 제기되자 이에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69년 훈련별대(訓鍊別隊)를 훈련도감에 속하게 하여 훈련도감의 규모가 축소되었다. 1666년에 이어 이해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지만 병이 위중하다는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다. 1671년 수어사(守禦使)에 임명되고, 1674년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나 곧 죽었다. 시호는 정익(貞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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