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장석현
작성일 2018-02-07 (수) 15:27
분 류 긴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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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 정명은 800년이 아닌, 9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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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 정명 800년이 아닌, 900년이다
(1215년이 아닌, 1117년부터)

2005년 계양구가 출발하였으니 올해로 계양구의 출발 13년이 되는 해이다. 그런데도 계양이란 이름이 시작된 해와 유래에 대해서는 아직도 믿을 만한 설이 없다. [계양사]나, [계양 역사와 오늘], [부평사], [부천사], [김포사] 등을 살펴보면 다, [고려사] 연혁의 기록을 따라 대체로 계양의 출발은 계양도호부가 생긴 고종 2년(1215년)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기타 고려시대에 관한 기록들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계양’이란 이름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생겨난 것으로 보이고, 그 유래도 이제까지의 주장과는 전혀 다름의 알 수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계양’이란 이름은 ‘계양도호부’가 설치된 고종 2년(2015)년부터 생긴 것이 아니라, 고려 개국공신 이희목의 4대손 이위가 고려 예종 12년(1117년) ‘계양군개국백’으로 봉작을 받고, 또 인종 즉위년(1122년) 계양공으로 봉작을 받은 후부터 생긴 것으로 보인다.
‘부평’이란 이름도 이와 다르지 않고, ‘부평부’가 생긴 충선왕 2년(1310년)이 부평의 시작이 아니라, 이희목의 3대손이며 이위의 아버지인 이정공(?~1099년)이 부평백에 봉작된 이후부터 시작된다.
‘안남도호부’ 역시 그 설치 장소와 존치 시기에 대해서도 다시 고찰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안남도호부는 [고려사] 지지 ‘양광도’ 안남도호부 연혁에 따르면, 고구려의 주부토군, 통일신라의 장제군을 거처 고려초 수주라고 불리다가, 예종 4년(1150년) 안남도호부, 고종 2년(1215년) 계양도호부로, 충렬왕 34년(1308년) 길주목으로, 충선왕 2년(1310년) 부평부로의 변천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고려사] 안남도호부의 연혁에 따르면 안남도호부는 통일신라말 지금의 전주(당시 완산주)에 처음 설치되었다가, 그 후 고부, 낭주(지금의 영암)으로 옮겼다가, 다시 전주에 설치되었다가 수주(지금의 계양산 북쪽, 이화동 일대)로 옮겼다가, 다시 중구봉 아래(지금의 경인여대 근처)로 옮겨 왔고, 옮겨 온 지 2년 만에 계양도호부로 개칭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이를 바탕으로 ‘계양’이라는 명칭은 그때부터 시작된다고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필자가 조사한 기록들에 따르면, 계양이라는 이름은 그 이전부터 여러 번 사용된 기록이 보이고, ‘계양군’이라는 지명도 여러 번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최초의 기록은 물론 고려 개국공신인 이희목의 4대손인, 이위가 ‘계양군개국백’이라는 작호와 함께, 봉호 2500호, 식실 호 300호를 봉작을 받은 것이다. 이후 인종으로부터 다시 ‘계양공’으로 작호를 받고, 봉호 5000호, 식실호 500호를 받은 것이 [고려사] 권98 열전 권제11  제신(諸臣) 이위 조의 기록에 보인다.
이 외에도 계양이라는 이름이 ‘계양도호부’ 이전에 쓰인 것이 더 여럿이 보인다.
1) 이인로가 명종 10년(1180년) 장원으로 급제하여 ‘계양관기’로 보임되었다, 직사관으로옮겼다.(고려사 권제102 열전 권제15 제신 이인로)
2) 황보양의 처 김씨의 아버지는 김후덕이요, 어머니 ‘계양군대부인’은 김구현의 딸이다.(황보양의 처 김씨묘지명.1149년. 국립중앙박물관)
3) 함수(1155-1211)의 본관은 항양(지금의 양평)이며, 자는 자진이다. 아버지는 상서 유일이다. (중략) 이후 예부낭중 지제고를 거쳐 형부낭중이 되었으며, ‘계양부’로 외보되기도 하였다.(함수의 묘지명. 1211. 국립중앙박물관)
4) 이응장(1121-1177)은 경원군 사람으로, 배향공신 수대사중서령 자연의 고손자로 아버지는 상서우복야 참지정사 판호부사 정정공 식이고, 어머니는 ‘계양군대부인’, 이씨는 수대사 중서령 이위의 딸이다.(이응장 묘지명. 1117년. 국립중앙박물관)
5) 이식(1095-1156)의 자는 처인으로 이자연의 증손이다. (중략) 의종 10년11월 14일에 우봉군(지금의 황해도 금천군 우봉면) 의룡산의 동쪽 기슭에 장사지냈다. 중서령 이위의 딸과 결혼하여 5남 4녀를 두었다. (이식 묘지명. 1156년. 국립중앙박물관)
6) 파한집에 이인로가, 옛날 내가 ‘계양’에 지방관으로 보좌하였음 때, 안렴사의 부를 받들고 용산에 이르러 상국 한언국(명종 3년-1173년 김보당의 난 때 죽음)의 서재에 묵었다. (중략) 상국을 뵙고 술을 마시다 이 시를 외니 (하략) (파한집 권상)
7) 옛날에 내가. ‘계양부’에서 수령을 보좌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배를 저어 공암현으로부터 행주 남쪽의 호수까지 간 적이 있었다.(하략)(파한집 권하. 초당의 가을 7월, 오동나무의 비 내리는 깊은 밤)
8) 고려사에 정축년 이위를 ‘계양군개국백’으로, 김준을 성서복야겸 태자소부로, 이궤를 정당문학 판한림원사 겸 태자소부로, (하략)(고려사 권14 세가 권14 예종 12년-1117년 12월(음))
9) 고려사에, 이위를 ‘계양공’으로, (하략) 각각 임명하였다.(고려사 세가 권제15 인종즉위년(1122년 5월 18일)
10) 고려사절요에, 정축 이위를 태부족 ‘계양군개국백’으로, 김준을 (중략) 각각 임명하였다.(고려사절요 예종 4년(1117년 12월 24일)
11) 같은 책에, 이자겸을 수태서 중서령 소성후로, (중략) 이위를 ‘계양공’으로 (하략) 각각 임명하였다.(고려사절요 인종 즉위년(1122년 5월)
12) 고려사 열전에 이위의 자는 직청으로, (중략) 예종 11년(16년)에 수태보 문하시중이 되고, 이듬해 대부로 승진하고 ‘계양백’ 식읍 2000호, 식실봉 300호에 봉하여 지고, 얼마 후 식읍 2500호, 식실봉 500로 봉해졌다.(고려사 열전 권제11 제신 이위)
13) 이 밖에 계양도호부라고 명명되었다는 고종 2년(1215년)보다 4년 뒤인 1219년에 왔다가 그 다음해 계양을 떠난 이규보의 문집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이규보의 시에, ‘계양수’ 손득지가 부모상을 빌미로 벼슬을 사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글에도 계양수라는 이름이 보이며, 기묘년 4월에 계양구가 조강을 건너는. 것을 보고란 글에도 ‘계양’로는 말이 보인다.(동국이상국집 권 제 33권 고서·비답·조서. 동국이상국집 제14권 고율시)
14) 또한 같은 책 동국이상국집에 계양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것이 60여 회나 되는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계양이라는 지명은 앞서 지적한 계양사나, 부평사, 부천사, 김포사 등에서 주장한 것처럼 계양도호부가 출발한 고종 2년(1215년)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 100여 년 전인, 이위가 계양군개국백으로 봉작을 받은 예종 17년(1117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 개국백의 봉작을 받은 이는 이자겸과 이성계도 외에도 여럿이 있다. 개국백은 그 말 앞에 붙은 지명의 땅을 처음 연다는 의미를 지고 있다고 본다.
또 1215년 이전에 쓰인 묘비명들에 계양이라는 지명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계양이라는 지명이 그 이전부터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계양도호부로 바뀐지 4~5년이 지나지 않아 계양이라는 말이 60여 회 동국이상국집에 거론된 것을 보면, 안남이라는 말보다 계양이라는 말이 그 이전부터 함께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계양산의 지명이 계양산이 된 것도 계양도호부가 생긴 이후가 아니라, 이위가 계양백으로 봉작을 받은 이후부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더 이상 계양이라는 이름이 계양도호부로부터 시작한다는 것과 계양산의 명칭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사라져야 하며, 이제까지의 기록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1)계수나무나 회양목이 많아 계양산이라 불렀다거나, 2)언어학적으로 변이가 일어나서 계양산이라 불렀다는 주장과 그 외의 주장은 맞지 않는 주장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계수나무로 잘못 알고 있고, 계양산에 심어져 있는 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생태학적으로 자생지가 될 수도 없는 일본이 자생지이다. 만약 고려시대부터 일본산 계수나무나 회양목이 많았다면 지금 한두 그루의 일본산 계수나무나 회양목 고목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 그루도 없다.
관계자들은 일본산 계수나무와, 회양목을 구를 상징하는 나무라고 계양산에 식목하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부평이라는 지명과 안남이라는 지명 유래에 대한 주장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2018년 1월 27일. 장석현 010 7624 7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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