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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1-30 (목)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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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5世 諱 瑋 11)

고려사 > 卷十三 世家 卷第十三 > 睿宗 4年 > 10월

예종 4년  1109년 10월 21일(음), 1109년 11월 15일(양)

이위 등을 관직에 임명하다  

○ 壬辰 以李瑋 叅知政事, 柳仁著爲殿中監 知樞密院事, 李資謙爲禮賓卿 樞密院副使, 金沽爲左承宣 知吏部事.

○ 임진일에 이위를 참지정사로, 유인저를 전중감 지 추밀원사로, 이자겸을 예빈경 추밀원부사로, 김고를 좌승선 지 이부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참지정사 [ 參知政事 ]  고려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2품 관직.
목종 때 처음 두었으며 문종 때 인원을 1인으로 하였다.
참지정사는 고려의 다른 제도와 마찬가지로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지만 실제적인 내용에서는 다른 점이 있었다. 당나라에서는 타관으로서 재상직에 있게 하는 허직(虛職)에 불과하였던 것이나, 고려에서는 타관에게 가하는 허직이 아니라 기능과 임무가 뚜렷한 실직이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이자겸 [ 李資謙 ]  ?∼1126(인종 4).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원(慶源 : 현재 인천). 아버지는 호부낭중(戶部郎中)을 지낸 호(顥)이고, 부인은 해주 최씨(海州崔氏)로 시중(侍中)을 역임한 사추(思諏)의 딸이다. 경원 이씨는 나말여초(羅末麗初) 인주(仁州) 지방의 호족세력으로서, 이허겸(李許謙)의 외손녀가 현종(顯宗)의 비[妃: 원성태후(元成太后)]로 책봉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귀족가문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시기는 이자겸(李資謙)의 할아버지인 이자연(李子淵) 때부터였다. 이자연의 세 딸은 모두 문종(文宗)에게 시집을 갔는데 인예태후(仁睿太后)· 인경현비(仁敬賢妃)· 인절현비(仁節賢妃)가 그들이다. 그리고 이자겸의 누이인 장경궁주(長慶宮主) 역시 순종(順宗)의 비가 되었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가문의 배경을 바탕으로 이자겸은 음서(蔭敍)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초직으로서는 매우 파격적으로 합문지후(閤門祗候)라는 자리에 제수되었다. 이후 그의 둘째딸이 예종(睿宗)의 비가 되면서부터는 더욱 빠른 속도로 출세하게 되었다. 참지정사(參知政事)·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거쳐 개부의동삼사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司徒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로 진급했으며, 이어 소성군개국백(邵城郡開國伯)에 봉작되었고 동시에 여러 아들들도 함께 승진되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이자겸의 권력이 왕실을 위협한다거나 혹은 조정의 권력을 독점할 수는 없었다. 예종이 모든 정치세력들을 균형 있게 조절해 어느 한쪽의 일방적 독주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았기 때문이다. 한안인(韓安仁) 일파가 세력을 쥐고 이자겸 일파와 대립, 암투를 벌였던 상황은 그와 같은 일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다 예종이 재위 17년 만에 죽고 인종(仁宗)이 이자겸의 보필에 힘입어 즉위하게 되면서부터 그의 정치적 위상은 크게 향상되었다. 우선 협모안사공신 수태사 중서령 소성후(協謀安社功臣守太師中書令邵城侯)에 책봉되어 신하로서는 최고직에 오르게 되었다. 이어 12월에는 반대파 제거에 나서게 되는데 왕의 작은아버지인 대방공 보(帶方公俌)와 한안인·문공인(文公仁) 등이 역모를 꾀했다고 하여 그 주모자와 일당 50여 명을 살해 또는 유배시켰다. 왕의 극진한 우대를 받으면서 양절익명공신 중서령 영문하상서도성사 판이병부 서경유수사 조선국공 식읍팔천호 식실봉이천호(亮節翼命功臣中書令領門下尙書都省事判吏兵部西京留守事朝鮮國公食邑八千戶食實封二千戶)에 제수된 이후, 사사로이 관부(官府)를 열어 관리들을 두기에까지 이른다. 동시에 부인은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봉해지고 여러 아들들도 함께 관직이 승급되면서 조정의 모든 권력은 이자겸에게 모아지게 되었다. 이자겸은 여기서 더 나아가 경원 이씨 이외의 성씨에서 왕비가 나오면 권세와 총애가 분산될 것을 우려해 강제로 셋째 딸을 의종의 왕비로 들여보내고 얼마 뒤에는 다시 넷째 딸 마저도 왕비로 들여보냈다.  그는 한때 사사로이 자기 부(府)의 주부(注簿)인 소세청(蘇世淸)을 송나라에 보내 표(表)를 올리고 토산물을 바치며 스스로 지군국사(知軍國事)라 칭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지군국사가 되고자 왕이 자기 집에 와서 그 조칙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날짜까지 정하였다. 지군국사란 나라의 모든 일을 맡고 있다는 뜻으로 신하의 신분으로는 가질 수 없는 직함이었다.
이 같은 전횡 때문에 왕도 그를 몹시 꺼려하였다. 이를 안 내시 김찬(金粲)과 안보린(安甫鱗)은 동지추밀원사지녹연(智祿延)과 공모해 왕에게 아뢰고, 상장군최탁(崔卓)과 오탁(吳卓), 대장군권수(權秀), 장군고석(高碩)과 함께 이자겸과 그의 일당인 척준경(拓俊京) 등을 제거하려는 거사에 나서게 되었다. 이들은 약속된 날 밤에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 우선 척준경의 동생인 병부상서척준신(拓俊臣)과 아들인 내시 척순(拓純) 등을 살해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이자겸의 난’의 발단이었다. 변란을 알게 된 이자겸과 척준경은 남은 무리와 병졸들을 이끌고 궁성을 포위한 후 불을 지르고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이에 놀란 왕은 글을 지어 이자겸에게 선위(禪位)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양부(兩府)의 의론을 두려워했고, 한편으로는 재종형제(再從兄弟)간으로 그의 발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이수(李需)와 귀족관료인 김부식(金富軾) 등의 반대로 저지되었다.
그 뒤 그는 왕을 자기 집으로 이어(移御)시키고 국사를 제멋대로 처리하였다. 이때 군신관계를 요구해 온 금나라에 대해 모든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받아들였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더군다나 아니라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인종을 여러 차례 독살하려 하였다. 그때마다 왕비의 기지로 왕은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인종의 밀명(密命)을 받은 내의(內醫) 최사전(崔思全)이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를 떼어놓는 데 성공하였다. 결국 이자겸은 척준경에 의해 제거되었고 유배지인 영광(靈光)에서 죽었다.

평가와 의의
1123년(인종 1)에 송나라 사신을 따라왔던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는 견문록에서 이자겸을 “풍채는 맑고 위의는 온화하며 어질고 착한 이들을 반겼다.”라고 평하고 있다. 이때가 이자겸이 한창 득세하고 있던 시기인 만큼 서긍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에게서 군자풍의 태도와 행동의 일면을 엿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습과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물과 권력을 지나치게 탐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이자겸전(李資謙傳)에 의하면, “남의 토전(土田)을 강탈하고, 복례(僕隷)들을 풀어 마차와 말을 약탈하여 자기의 물건을 날랐다.”고 하는 등 권세를 남용하고 공공연히 뇌물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좀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집에는 썩어가는 고기가 항상 수만 근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고려도경』에도 전해지고 있다. 이자겸은 강력한 정치권력과 함께 당시 또 하나의 큰 세력이던 사원과의 긴밀한 유대를 통해 정계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였을 뿐만 아니라 왕권에까지도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자겸의 권력독점은 종전 귀족관료 간의 견제와 균형의 묘미를 깨트리게 되었고 아울러 고려의 왕권마저도 함께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도경(高麗圖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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