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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1-03 (금)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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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5世 諱 瑋 07)

고려사 > 卷十二 世家 卷第十二 > 肅宗 10年 > 6월

숙종 10년  1105년 6월 9일(음), 1105년 7월 21일(양)

6월 정기인사에 위계정 등을 임명하다

○ 甲戌 以魏繼廷爲太子太傅, 崔弘嗣檢校太尉守司徒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兼太子太保 判尙書禮部事 脩國史, 尹瓘爲太子少保 判尙書兵部 翰     林院事, 李䫨守司徒太子少師兼西京留守使, 鄭文爲刑部尙書 政堂文學兼太子賓客, 任懿爲樞密院使 吏部尙書, 王嘏 知樞密院事 兵部尙書, 吳延寵 同知樞密院事 秘書監 翰林學士承旨, 金景庸 判尙書工部事, 李瑋爲御史大夫.

○ 갑술일에 위계정을 태자대부로, 최홍사를 검교태위 수 사도 중서시랑동 중서문화평장사 겸 태자태보 판 상서예부사 수국사로, 윤관을 태자소보 판 상서병부 한림원사로, 이오를 수 사도 태자소사 겸 서경 유수사로, 정문을 형부상서 정동문학 겸 태자빈객으로, 임의를 추밀원사이부상서로, 왕가를 지 추밀원사 병부상서로, 오연총을 동 지 추밀원사 비서감 한림학사 승지로, 김경용을 판 상서공부사로, 이위를 어사대부로 각각 임명하였다.

어사대부 [ 御史大夫 ]  고려시대 어사대의 정3품 관직. 정원은 1인이다
어사대는 고려의 감찰기관으로 정치의 잘잘못을 따지고 풍속을 교정하며 관리들의 불법행위를 살펴 탄핵하는 일 뿐 아니라, 중서문하성의 낭사(郎舍)와 더불어 대간(臺諫)이라 불리며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과 주요 정책이나 관리 인사에 대한 서경(署經)·봉박(封駁)의 권한을 행사하던 기관이었다. 어사대 직제에는 어사대부 위에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있었지만 재상이 겸하는 자리였으므로 실제로는 어사대부가 어사대의 책임자가 되었다. 995년(성종 14) 국초부터 있었던 사헌대(司憲臺)를 어사대로 개편할 때 처음 설치되었다. 이후 어사대가 1014년(현종 5) 금오대(金吾臺)로, 이듬해 사헌대로 개편되는 동안 없어졌다가 1023년 어사대가 복구되자 다시 설치되었으며, 문종 때 품계와 정원이 정해졌다. 1275년(충렬왕 1) 원의 간섭으로 고려의 관제가 격하될 때 어사대가 감찰사(監察司)로 개편되면서 감찰제헌(監察提憲)으로 바뀌었다. 이후 사헌대부(司憲大夫)·대사헌·감찰대부 등으로 개칭되다가 1356년(공민왕 5) 고려 전기의 관제를 회복하면서 어사대부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어사대가 1362년에 감찰사로 개편되면서 감찰대부로 고쳐졌고, 1369년에 다시 사헌부로 개편되자 대사헌으로 고쳐져 조선으로 이어졌다.
참고문헌『고려사(高麗史)』『고려시대(高麗時代) 대간제도(臺諫制度) 연구(硏究)』(박용운, 일지사, 1980)

윤관 [ 尹瓘 ] (? ~ 1111) 본관 파평(坡平). 자 동현(同玄). 시호 문숙(文肅). 고려시대의 명신· 명장.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습유(拾遺)·보궐(補闕)을 거쳐 1095년(숙종 즉위) 좌사낭중(佐司郞中)으로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추밀원지주사· 어사대부· 이부상서 등을 거쳐 1104년 추밀원사로서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여진을 정벌하다가 실패하였다. 그뒤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여 군대를 양성, 1107년(예종 2) 여진 정벌군의 원수가 되어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진, 이때 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 공험진(公嶮鎭)· 숭녕(崇寧)· 통태(通泰)· 진양(眞陽)의 9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고 이듬해 봄에 개선, 그 공으로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서이부판사(尙書吏部判事)· 군국중지사(軍國重知事)가 되었다. 그 뒤 여진은 9성의 환부를 요청하며 강화를 요청해오자, 조정은 9성을 지키기 어렵다 하여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정세가 바뀌자 여진정벌의 실패로 모함을 받아 벼슬을 빼앗기고 공신호마저 삭탈되었으나, 예종의 비호로 1110년 수태보(守太保)·  문하시중(門下侍中)· 병부판사(兵部判事)· 상주국(上柱國)·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었다.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임의 [ 任懿 ]  (계양공 휘 瑋의 사돈. 외손녀인 공예왕후의 아버지인 임원애의 아버지) 정안현(定安縣 :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군) 사람으로 젊어서부터 열심히 공부해 과거에 급제했다. 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의 명성을 듣고 왕에게 아뢰어 전첨(典籤)으로 삼았으며, 즉위하자 여러 차례 전임해 우승선(右承宣)이 되었다. 숙종이 처음 즉위하자 내인(內人)이 묵은 감정을 가지고 그를 여러 차례 헐뜯었다. 그러나 왕은 평소 그가 순수하고 바르며 다른 마음이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헐뜯는 말이 들어가 버렸다. 이후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옮겼다. 송나라의 철종(哲宗)이 죽자 임의가 시랑(侍郞) 백가신(白可臣)과 함께 조문 사절이 되어 송나라로 갔다. 사신 일행이 모두 재물의 이익에 탐욕을 부렸지만 임의만은 청렴하고 삼가니 송나라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다. 황제가 내려준 『신의보구방(神醫普救方)』을 가지고 귀국하자 왕은, “이 책은 세상을 구제하는 중요한 의술을 담은 것이니, 가지고 온 사신(使臣)과 부사(副使) 및 막료(幕僚)들에게 관작과 상을 주어야 할 것이다.”고 칭찬했다. 곧이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으며, 예부상서(禮部尙書)· 병부상서(兵部尙書)· 이부상서(吏部尙書)· 상서좌복야(左僕射尙書) 및 참지정사(叅知政事)를 지냈다. 예종 초에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上柱國)으로 승진하고 곧이어 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가 되었다. 뒤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서 권동북면병마사(權東北面兵馬事) 겸 행영병마사(行營兵馬使)가 되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김연(金緣)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임의 등이 하직 인사를 올리자, 왕은 중광전(重光殿)에서 친히 부월(鈇鉞)을 주고 안마(鞍馬)· 의복·  채단을 내려주었으며 근신(近臣)을 보내어 교외에서 전송하게 했다. 또 귀환하자 중광전에서 그들을 접견하였다. 당시는 최홍정(崔弘正) 등이 앞서 9성의 군민(軍民)과 병장기를 거두어들인 뒤였고, 임의 등의 행군이 느려 변방 수비에 관한 일은 전혀 조치한 것이 없었으며 공연히 연락병만 번거롭게 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였다. 뒤에 수태위(守太尉)· 문하시랑 동 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상주국(上柱國)으로 올려주고 사직하게 하였으며 좌리공신(佐理功臣)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12년(1117)에 죽으니 나이 일흔 일곱이었다. 시호를 정경(貞敬)이라 했으며 인종은 중서령(中書令)을 추증하였다. 아들은 임원후(任元厚=임원애)· 임원준(任元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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