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十九世)

이세화

(李世華)

1630∼1701 자는 군실(군실) 호는 쌍백당(쌍백당) 효정8년(1657)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하시어 정언 전적 장영 병조정랑(兵曹正郞)등 을 거쳐 현종13년(1672) 광주부윤(廣州府尹)에 제수되어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식 수 부족을 들어 수백 보의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강무대(講武臺)를 세우니 우재(尤齋) 송선생(宋先生)이 지수당(地水堂:경기도 지방문화재 11호)이라 현판(縣板) 했다. 그 후 황해도 평안도 전라도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숙종10년(1684)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사은사(謝恩使)에 발탁되어 영의정(領議政) 남구만(南九萬)과 함께 연경에 다녀왔다. 숙종15년(1689)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서호(西湖) 향리로 돌아왔다. 그 해 인현왕후(仁顯王后) 폐비 설을 듣고 판서 오두인과 응교 박태보와 반대소를 올려 친국(親鞫)을 받고 정주로 유배중 중도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크게 뉘우쳐 중전을 복위(復位)할 때 공을 대사간(大司諫) 및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다가 민비(閔妃)의 복위책례도감(復位冊禮都監)에 발탁되자 "내가 일찍이 국모를 위해 죽었어야 할 몸이 죽지 않고 오늘 복위도감에 중책을 맡게 되니 내 어찌 사양하랴" 하며 서울 근교에 다다르니 또 수어사(守禦使)를 겸하는 교지가 내렸다. 얼마 후 의금부사(義禁府事)겸 지 경연(知 經筵) 및 세자빈객(世子賓客)을 겸할 때 청백리(淸白吏)로 선발되었다. 내국제조(內局提調)가 되시고 1695년(숙종21)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겸 호조판서(戶曹判書)로서 수어사(守禦使)도 겸하여 군정도 관장했다. 다음해 공조판서(工曹判書)와 경연(經筵)에 제수되었다.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어 1697년 5월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오르고 뒤이어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어 남한산성을 정비하고 다시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임명되어 10월에 병조판서를 사직하였다.1699년 3월 승록대부로 승진되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일곱 번에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4월에 임금이 태묘(太廟)에 제사 올리는데 예조판서가 주관하도록 명이 내리니 행사가 끝나면 사직할 것을 허락받고 수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같이 육조판서(六曹判書)를 두루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다. 10월에 다시 병조판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만 남기고 나가지 않았다. 겨울에 특별히 정승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700년 3월 중전에 환우가 위중하여 약청(藥廳)을 설치하는 의론이 있어 상경하니 정승에 물망에 올라 약청에 의론만 마치고 돌아오니 다시 6월에 이조판서와 정승의 명이 내렸으나 한사코 사양하니 7월 대정(大政:인사 평가)때 파면했다. 선영하에 연못에 잣나무 두 구루를 마주보게 심고 소요 한다는 뜻으로 호를 쌍백당(雙栢堂)이라 했다. 풍질로 인해 병이 위중하여 치료의 편함을 위해 서울집에 올라가니 임금이 어의(御醫)를 보내고 탕제를 내렸으나 병이 더욱 깊어 고향에 돌아와서 8월 15일에 별세하시니 수는 72세이시다. 부음을 듣고 임금이 크게 애도하여 부의(賻儀)를 내리고 성균관 유생들과 문무의 관원들이 차례로 와서 곡을 하였다. 장능(莊陵) 능역(陵役)때 공인들이 와서 일을 도와 파주 선영하에 10월에 장사지냈다. 1701년 11월 임금이 특별히 은혜를 더하여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고 정문(旌門)을 명하고 충숙(忠肅)의 시호를 내렸다. 풍계 충열사(豊溪 忠烈祠)와 함경북도 충렬사와 북청에 노덕서원(老德書院)에 향사(享祀) 되었다. 저서로는 《雙栢堂先生集》이 있다. 묘(墓)하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우니 재상(宰相)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이 서(序)와 명문(銘文)을 찬(撰)하고 영의정(領議政)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이 전(篆)했으며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가 글씨를 썼다. 공의 묘(墓)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선유 4리 새능(新陵)에 위치하고 1980년 경기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 60호로 지정되었다.

이세유

(李世維)

자는 지세(持世) 초휘는 세백(世白) 1645년 을유(인조23)에 나시어 1679년 기미(숙종5) 향시에서 새웡진사(生員進士) 양과에 합격하고 목능참봉(穆陵參奉)이 되고 1694년 갑술(숙종20) 별시을과(別試乙科)에 급제하시어 승문원(承文院)의 주서(注書)가 되고 병조정랑(兵曹正郞)과 직강(直講),지평(持平)을 거쳐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시강원(侍講院) 보덕(輔德) 후에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장례원 판결사(掌隸院 判決事)에 올랐다. 1709년 참지승지(參知承旨)가 되고 뒤에 장단부사(長湍府使)로 나가시어 관사에서 1711년 신묘(숙종37)에 별세하셨다. 아드님 휘 정제(廷濟)가 귀히 되시니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시고 후에 다시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에 증직되셨다. ⊙대제학 윤순 찬행장(大提學尹淳撰行狀)

이세익

(李世翊)

자는 숙필(叔弼) 1628년 병인(인조4)에 나시니 타고난 바탕이 뛰어나고 성품이 엄정하셨다. 어려서 집이 가난하여 노복(老僕)이 없이 낮에는 나무하고 밤에는 글을 읽어 학업이 날로 성장해 1650년 갑인(효종1)에 즉위증광과(卽位增廣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기사관(記事官)을 겸하고 인조실록(仁祖實錄)을 편찬했다. 1556년 지평이 되고 이듬해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이어 1667년 장악정(掌樂正)에 제수되어 서장광(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673년 승지(承旨)를 거쳐 1681년 황해감사(黃海監司)에 올랐다. 1705년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셨다.

이세주

(李世冑)

자는 백승(伯承)이며 호는 제운(霽雲) 1626년 병인(인조4)에 나시었다. 장성하여 학문에 힘써 경전(經典)을 모두 외웠으며 일찍이 학질 병에 신음하셔 백약이 무효할 때 의원의 말이 『하루 참새 두어 마리씩 백일동안 드시면 쾌차할 것이다』하니 공이 비바람을 가리지 않고 몸소 참새를 잡아 공궤(供饋)하니 완치되셨다. 가세가 빈한하였으나 귀천(貴賤)과 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려움을 당하거나 병든 자를 도왔으며 우매(愚昧)한 자를 설득 개과천선(改過遷善)시켰다. 학문이 높았으나 과거에 응하지 않고 40여년을 무보수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아침부터 밤늦도록 제자들 앞에 단정히 앉아 문사(文詞)보다 인륜강상(人倫綱常)과 성훈(聖訓) 교육에 힘써 제자중 대과급제가 3인이고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자 수십인 이며 나머지 인사는 모두 향리의 선사로 이름을 드높이니 경향에서 제운공 선생을 칭송하는 소리가 높았다. 영의정 명곡 최석정(領議政 明谷 崔錫鼎)이 공의 족질 효정공(孝貞公)에게 말하기를 『요즈음 집이나 서당의 풍습이 옛것과 점차 멀어져 남아있지 못할 지경인데 그대의 족부(族父) 제운공이 향리의 수재들을 많이 모아 가르쳐 경향에서 직하(稷下)의 옛 풍습이 넓다하니 내가 매우 흠모하노라. 충숙공(忠肅公)같이 대쪽 같은 분이 드문데 공의 문중에 이와 같은 분이 또 계시니 깊이 존경하고 감복한다.』하였다. 1707년 정해(숙종33)에 나라의 큰 경사가 있어 80세 이상 되는 노인에게 작위를 내려 통훈대부(通訓大夫)가 되고 이해 겨울 문하생 현감 윤식(尹植)등이 임금께 공의 교육의 공을 상소하고 1709년 기축(숙종35)에 경연(經筵) 자리에서 정승(政丞) 조상우(趙相遇)가 직접 아뢰어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리고이어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하고 이듬해 다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하고 삼대(三代)를 추봉(推封)하는 영광을 입었다. 공이 두 번째로 대궐에 나가 사은(謝恩) 드릴 때 공의 나이 85세로 백발은 소소하나 안색은 소탕(韶蕩)하고 강건하시어 예(禮)를 갖추는데 소년과 다름없어 대신들과 당료들이 말하기를 지상의 신선이라 칭송했다. 1710년 경인(숙종36)에 85세로 별세하시니 동춘 선영 건좌(乾坐)에 모셨다. 1992년 5월 30일 평택시 진위면 동천리 선영에 이장되었다. 이장때 발굴하는데 출사된 관(棺)은 인천 지방문화재 제6호로 인천시립박물관에 보존됐으며 신도비(神道碑)는 평택 선영에 위치한다. 배위는 정부인 언양김씨(貞夫人 彦陽金氏)로 호군 정훈(護軍庭訓)의 따님이시다.

이윤생

(李允生)

자는 덕실(德實) 1604년 갑자(선조37)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의리를 중히 여기고 지략이 뛰어나 말 타기와 활쏘기 재주가 있었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 오랑캐가  원도(猿島:원도는 강화와 남한산성을 잇는 요충지)까지 침입하니 많은 장정을 모아 『우리는 비록 군인은 아니나 국가의 위기를 피할 수 없으니 한 놈을 죽이고 죽더라도 나라를 위해 함께 나서자』하며 활을 쏘니 공이 쏘는 화살에 쓰러지지 않는 놈이 없어 처음에는 퇴각했으나 화살이 다함을 알고 섬으로 엄습해오니 젊은이들은 다치고 전사하고 달아나 홀로 분전하다 장렬히 전사하시니 때는 1637년 정축(인조15) 1월 25일이다. 부인 금천강씨(婦人衿川姜氏)는 공의 전사 소식을 듣자마자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자진했다. 조정에서 부인에게 열녀(烈女)의 정려(旌閭)를 명하고 공에게는 충무위 부사과(忠武衛副司果)를 내리고 1862년 임술(철종13)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겸 경연 참찬관(兼 經筵參贊官)에 증직되고 정려(旌閭)를 명했다. 정려(旌閭)는 1990년 11월 16일 인천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 4호로 지정되었다. (인천광역시 남구 용현동353)

※승지공파의 중시조이시다.

 

  20세(二十世)

이정제

(李廷濟)

자는 중협(仲協) 호는 죽호(竹湖) 1670년 경술(현종11)에 태어나 처음 말을 배울 때에 이미 문자를 이해하고 다섯 살 때 당시(唐詩)를 배웠으며 이십 전에 이미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통달하여 1699년 기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다음해에 경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의 주서(注書)를 시작으로 전적(典籍)을 거쳐 1705년 시강원(侍講院) 사서(司書)로 재직 시 갑자기 임금께서 선위(禪位)의 명이 내리니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간하고 세자가 연하여 세 차례에 부당함에 상소를 올리게 하여 명을 거두게 했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지내고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와 암행어사(暗行御史)로 호남지방의 많은 민폐를 고쳤다. 문학(文學)겸 지제교(知製敎)로 임명되어 수찬(修撰)에 임명됐다.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을 거쳐 시강원(侍講院) 보덕(輔德)에 이어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충헌 김창집(金昌集)의 죄상을 논의하고 노론(老論)에 축출에 가담했다 노론의 집권으로 잠시 삭직되었다. 뒤에 옥당(玉堂)에 들어 교리(校理) 응교(應敎)를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실록당상(實錄堂上)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 1722년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이어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재직 시 기자묘(箕子廟)를 세우고 기자궁구기비(箕子宮舊基碑)의 비문을 찬하고 배향케 하니 기자(箕子)의 후예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1727년 도승지(都承旨)에 오르고 1728년 인량(麟亮)의 란(亂)을 평정하고 이듬해 대사헌(大司憲) 1730년 예조참판(禮曹參判)을 거쳐 다음해에 자헌대부 공조판서(資憲大夫工曹判書)에 임명되고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어 우참찬(右參贊)으로 옮겼다.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이어 1734년 좌참찬(左參贊)과 호조판서(戶曹判書)와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제수됐다. 임금의 특명으로 판금오(判金吾)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발탁되고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이어 예조판서(禮曹判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됐다. 40년간 벼슬길에 있으면서 오직 청렴 강직하여 셋집에 살며 돌아가실 때는 관사에서 운명하였다. 시호(諡號)는 효정(孝貞)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여흥민씨(貞敬夫人 驪興閔氏)로 통덕 형(通德 泂)의 따님이고 두 번째 부인은 정경부인 연일정씨(貞敬夫人延日鄭氏)로 수사 석실(水使碩實)의 따님으로 공이 돌아가시자 22일간 단식 절명하니 조정에서 열녀(烈女)의 정문(旌門)을 명하고 모친이 93세이므로 생전에 늠록(廩祿)을 주도록 하였다.

 

  21세(二十一世)

이섭원

(李燮元)

초휘보원(初諱輔元) 자는 성화(聖和) 호는 고암(高巖) 1701년 신사(숙종27)에 태어나시어 1726년 병오 식년시(丙午式年試)에 합격하고 1736년 병진정시(丙辰庭試)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 이듬해 정사년 중시(丁巳年重試)에 장원(壯元)하여 전적(典籍)과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시강원(侍講院) 사서(司書)에 임명됐다. 1743년 병조정랑(兵曹正郞)을 거쳐 양사에 사간(司諫)과 집의(執義)를 지내고 울산부사와 안주목사로 외직을 수행하고 돌아와 시강원(侍講院) 보덕(輔德)에 제수되어 춘추관 편수관(春秋館 編修官)을 겸했다. 다시 서천군수와 광주목사등 외직을 지내고 1757년 춘방(春坊)에 들어가 응제(應製)의 수석(首席)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 1761년 대사간(大司諫)에 오르고 1764년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임명하고 시종신(侍從臣)에게 베푸는 기로과(耆老科)에 일등을 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호피(虎皮)를 하사받고 재상반열에 오른 것은 뛰어난 문장 때문이라 부러워했다.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니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교체할 것을 청하고 고향으로 내려오니 동지돈영부사(同知敦寧府事)와 공조참판에 임명되고 1767년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이어 대사간과 동지 의금부사(同知 義禁府事) 도총부 부총관(都摠府 副摠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치사(致仕)할 것을 청하고 1770년(영조46) 1월 14일 임금이 친히 숭정전(崇政殿)에서 선마(宣麻)한 뒤에 손수 사언사구(四言四句)를 내렸다. ≪兄弟事予 正卿亞卿 卿願今遂 予心悵然 ≫ 봉조하(奉朝賀)를 내렸다. 임금께서 부의(賻儀)를 내리고 제문을 지으셨다.

이익원

(李翼元)

자는 성휴(聖休) 호는 학음(鶴陰) 1711년 시묘(숙종37)에 태어나시어 1738년 무오 식년문과(式年文科) 을과 이등(乙科二等)으로 급제하여 승정원(承政院)에 입당(入堂)했다. 부친상 삼년을 마치고 승정원 주서(注書)와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양사(兩司)의 정언과 지평을 지내고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옮겼으며 1749년 지평(持平)에 오르고 이듬해 다시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임금의 독단을 간하는 상소를 올려 파직되고 영의정 조현명이 다시 임금의 독단을 간하며 공을 두둔하다 체직되었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 문학(文學) 병조정랑으로 뽑혔으나 임금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아 이조에서 추천하지 못했다. 비로소 1752년 정언(正言) 지평(持平)을 거쳐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옮겼다. 이듬해 사헌부 장령(掌令)을 거쳐 잠시 태안군수(泰安郡守)로 나갔다가 1755년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이 되었는데 장헌세자(莊獻世子)가 왕위를 대신한 뒤이며 예에 따라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했다. 이듬해 사간원 사간(司諫)에 올라 동궁에게‘경천 애민(敬天愛民)’에 대해 상서하여 임금으로부터 말을 하사받았다. 겨울에 승정원(承政院)으로 옮겨 오개 월동안 좌우(左右)와 부승지(副承旨)를 맡았으며 1757년 노모의 봉양의 편의를 호소해 양주목사로 자리를 옮겼다가 다시 승지로 임명되었으나 노소론(老小論) 으로 갈려 세자를 음해하는 간당들의 흉계로 세자가 위태로워 부자간(父子間)의 화해를 도모했으나 흉당들의 간계로 드디어 세자가 뒤지속에 같이는 참사가 일어났다. 공이 청심환 한주먹을 넣고 옷소매를 잡고 죽기를 무릅쓰고 간하니 임금께서 진로하려 공에게 파직을 명하였다. 곧 다시 불러 전교를 쓰라 명하니 교지 내용을 참아 들을 수 없는 내용이라 붓을 던지고 죽기로 간하니 임금이 직접 전교를 쓰시고 공에게 다시 반포하라 명하였으나 또 불응하여 조중회(趙重晦)로 승지를 삼고 반포하라 하니 다시 공이 나서 죽기로서 거둬주길 간하니 임금이 대노하여 교체하라 하셨다가 다시 유임하라 명하시니 양일간에 세 번의 유임과 교체의 명이 세 번이나 있었다. 다시 임금께서 정명(政命)으로 전교를 반포하려하니 공은 더욱 망극하여 실성호곡으로 교지를 적시니 면천으로 유배되었다. 1763년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승정원에 임명됐다. 1766년 병술(영조42)에 돈영부 도정(都正)을 거쳐  1768년 가선대부 형조참판(嘉善大夫 刑曹參判)에 오르고 한성부좌윤(한성부좌윤)을 거쳐 1770년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당상관(堂上官)에 오른 후 십여 년간을 승정원(承政院)에 일곱 차례에 걸쳐 승지를 역임했으니 임금의 신임이 이같이 두터웠다. 1771년 정월에 자헌대부 한성부판윤(資憲大夫 漢城府判尹)에 임명됐다. 6월에 다시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임명되어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와 상약(嘗藥)을 겸하고 다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고 이듬해 형조판서(刑曹判書) 겸 도총관(都摠管)이 되고 가을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겸 지경연사(知經筵事)에 제수되고 7월에 호피(虎皮)를 하사받다. 1773년 형조판서(刑曹判書)와 다시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옮겼다가 세 번째로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했다.

이태원

(李太元)

자는 유화(囿和) 1673년 계축(현종14)에 태어나시어 1702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시고 1710년 경인(숙종36) 증광별시(增廣別試)에 급제하시어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서 1722년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을 지내시고 잠시 홍주목사(洪州牧使)로 외직으로 나가셨다가 1727년 통훈대부 시강원(通訓大夫侍講院) 필선(弼善)을 지내셨다.

이진원

(李震元)

자는 진흥(震興) 1725년 을사(영조1) 무과병과  제81인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를 지내시고 1746년 병인(영조22)에 졸하셨다.

 

  23세(二十三世)

이경심

(李敬心)

자는 사엄(士嚴) 1746년 병인(영조22)에 나시어 1774년에 참봉(參奉)에 합격하시고 이듬해 갑오정시(甲午庭試)에 급제하시어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과 1790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지내셨다.

이경삼

(李敬參)

자는 사로(士魯) 1763년 계미(영조39)에 나시어 1795년 을묘(정조19) 사마시(司馬試)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1798년 문과에 급제하여 다음해에 사간원 정언(正言)과 사헌부 장영(掌令)을 거쳐 홍문관 옥당(玉堂)에 들어 수찬(修撰)과 교리(校理)를 지내고 다시 사헌부(司憲府) 장영(掌令)을 거쳐 1820년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 1832년 4월 13일(순조32) 나라에서 열녀 정려(烈女旌閭)를 명하였다.

이주순

(李周淳)

자는 중희(仲熙) 1809년 기사(순조9)에 나시어 1890년 경인(고종27) 기로과(耆老科)에 급제하여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과 가선대부 병조참판동 경연(嘉善大夫 兵曹參判同 經筵)을 지내시고 1892년 임진(고종29)에 졸하셨다.

이주백

(李周百)

자는 문약(文若) 1750년 경오(영조26)에 나시어 1783년 계묘무과(癸卯武科) 병과(丙科)에 2인으로 급제하여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를 지내셨다.

이주현

(李周顯)

자는 성모(聖模) 1743년 계해(영조19)에 나시어 1772년 임진정시(壬辰庭試)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통정대부 좌승지(通政大夫 左承旨)를 지내셨다.

 

  24세(二十四世)

이진만

(李鎭晩)

초휘진기(初諱鎭箕) 자는 송수(松叟) 1795년 을묘(정조19)에 나시어 1813년에 진사(進士)에 올라 1823년 계미정시(癸未庭試)에 급제하여 통훈대부 시강원 문학(通訓大夫侍講院文學)을 지내시고 은산 현감(殷山縣監)을 지내셨다.

 

  25세(二十五世)

이선영

(李善永)

자는 종숙(宗叔) 1830년 경인(순조30)에 나시어 1859년 기미무과(己未武科)에 급제하시어 통훈대부 승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겸 내금위장 (通訓大夫陞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兼內禁衛將)에 오르시고 이어서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겸 내금위장(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內禁衛將)을 지내셨다.

이건영

(李建永)

자는 준삼(俊三) 호는 석암(石巖)으로 1839년 기해(헌종5)에 나시어 1865년 을축(乙丑) 문과에 급제하시어 승문원(承文院)에 정자(正字)가 되시고 1884년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이듬해 사헌부(司憲府) 장영(掌令)에 올랐으며 통정대부 우부승지(通政大夫 右副承旨)에 제수되고 이어서 특명으로 호남소모사(湖南召募使)가 되었다.

 

  27세(二十七世)

이연광

(李演光)

생부병정(生父秉貞) 자는 공우(公禹) 1833년 계사(순조33)에 나시어 음사(蔭仕)로 정능 참봉(靖陵參奉)을 거쳐 금천군수(金川郡守)를 지내시고  1903년(광무7년)에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고 이듬해인 1904년에 내장원 경(內掌院卿)에 오르셨다. 1910년(순종3) 가의대부(嘉義大夫)에 가자되셨다.

 

  28세(二十八世)

이헌경

(李軒卿)

생부연광(生父演光:견하 38p) 자는 용칠(容七) 1851년 신해(철종2)에 나시어 1874년 갑술 증광시(甲戌增廣試)에 급제하시어 1880년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지내셨다. 다시 이조참의(吏曹參議)와 예방승지(禮房承旨)를 거쳐 1896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올랐다. 1900년에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되시고 1901년 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에 올으시고 뒤이어 장례원 소경(掌禮院少卿)을 거쳐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에 임용되셨다. 1904년 함경남도 관찰사(咸鏡南道觀察使)에 나가셨다 1906년 정2품으로   예식원 장례경(禮式院掌禮卿)에 임용되고 뒤이어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셨다.

이훈경

(李勛卿)

자는 기일(夔一) 1857년 정사(철종8)에 나시어 1880년 경진증광시(庚辰增廣試)에 급제하시고 1883년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을 거쳐서 1885년 동지사 서장관(冬至使書狀官)에 다녀와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과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를 거쳐 1890년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올으시고 이듬해 1891년 신묘(고종28)에 졸하셨다. 묘는 용인선영목천공묘계하사좌(龍仁先塋木川公墓階下巳坐)에 모셨으며 배위는 숙부인청송심씨(淑夫人靑松沈氏)로 능표(能杓)의 따님이다. 후비는 숙부인해주정씨(淑夫人海州鄭氏)로 감역수항(修恒)의 따님이다.

※충숙공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