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始祖)

이희목

(李希穆)

본시 신라말기 장제군(長堤郡:김포반도)의 계양산에 본거지를 두고 옛 장제군(長提郡) 수안(水安). 동성(童城). 통진(通津). 김포(金浦) 등 네 개의 현을 통치한 호족 군장(豪族君長)이였다.  당시 신라는 전성기를 지나 진성여왕 이후 계속 국운은 기울어져 행정력이 지방에 까지 미치지 못하니 전국의 지방 고을은 군웅할거지(群雄割據地)로 변했다. 이때 태조 왕건(太祖王建)은 고려의 장수 홍유(洪 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등과 함께 송경에서 가장 가까운 요충지인 김포반도의 장제군의 호족군장인 이희목(李希穆)을 회유하어 높은 벼슬을 주고 고려왕조 창업에 협조할 것을 권유하여 그대로 장제군을 다스리게 하니 이에 귀부(歸附)하여 김포 부평 인천 양천 부천 일대를 무혈점령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공으로 태조는 공에게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에 책봉하고 삼중대광 태사(三重大匡 太師)의 벼슬을 내렸다. 시호는 충민(忠敏)이다.

 

  2세(二世)

이능목

(李能睦)

衛尉 主簿 왕건 태조(王建 太祖)의 호족들을 회유 무마하는 기인제도(其人制度)와 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로 기인(其人)이 되어 송경(松京)에 출사하였다. 위위 주부로 추증되셨다.

 

  3세(三世)

이 서

(李 書)

전중내 급사(殿中內 給事)로 추증되었다.

 

  4세(四世)

이정공

(李靖恭)

?~1099 개국공신(開國功臣) 이희목(李希穆)의 증손(曾孫)이다. 고려 중기의 명신으로 문종(文宗) 이후 순종(順宗). 선종(宣宗). 헌종(獻宗). 숙종(肅宗)에 이르기까지 오조(五朝)에 걸쳐 역사(歷仕)한 분으로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문종13년(1059) 지남원부사 시예부원외랑(知南原府使試禮部員外郞)으로 있을 때 유가서(儒家書)인 《삼례도(三禮圖)》53판과 《손경자서(孫卿子書)》92판을 새로 새겨 바치니 국왕이 비각(秘閣)에 두게 하고 조서와 포상을 내렸다. 이듬해 문종14년(1060)에 시어사(侍御史)에 오르고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처 문종24년(1070) 한림학사에 임명되고 문종27년(1073)에는 위위경(衛尉卿)으로 왕명을 받아 상서성에 나가 왕자 수(琇)를 개부의동삼사 검교상서령 수사공 상주국 평양후(開府儀同三司 檢校尙書令守司空上柱國平壤侯)로 책봉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문종29년(1075) 진사시에 예부상서로 지공거(知貢擧)를 맡았으며 이듬해에 병부상서에 올랐고, 문종35년(1081)에는 참지정사 수국사(參知政事 修國史)로 국사(國史)를 편찬 했으며 이듬해에 좌복야(左僕射)에 제수되었다. 문종37년(1083) 정월에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고 선종2년(1085) 평장사(平章事) 김양감, 참지정사(參知政事) 왕석(王錫)과 함께 시정의 득실(得失)을 상주(上奏)하였다. 선종3년(1086)에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11년동안 재임후 숙종 2년(1097) 문하시중에서 치사(致仕)하였다. 특히 이해에 국청사(國淸寺)가 낙성되니 왕이 친히 경찬도장(慶讚道場)을 열어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치사(致仕)한 이정공(李靖恭)과 양부재신(兩部宰臣)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상을 내렸으며 왕이 친히 지은 경찬시(慶讚詩)를 유신들이 화답하게 하였으며 지어 올린 화답시를 공이 보고 우열을 가렸다. 또한 왕명을 받아 3천여 칸에 달하는 흥왕사(興王寺)의 비문을 찬진(撰進)하니 필단(匹段) 은기(銀器) 다포(茶布) 안마(鞍馬)등을 하사받았다. 숙종4년(1099) 5월에 졸하시니 왕이 조위하는 교서를 내리고 부평백(富平伯)에 봉하였다. 예종2년(1107)에 순종(順宗)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5세(五世)

이숙(李璹)

(일명 도)

?~1131 문하시중(門下侍中) 정공(靖恭)의 장남으로 예종(睿宗) 원년(1106) 낭장(郎將)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처 인종(仁宗) 6년(1128)에 검교사도수사 우복야(檢校司徒守司 右僕射) 예부사(禮部事)를 지내고 이어서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다. 문하시중 김경용(金景庸)의 사위이다.

이 위

(李 瑋)

1049~1133 문하시중(門下侍中) 정공(靖恭)의 차남으로 인종의 비(妃)인 공예태후(恭睿太后)의 외조부이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상서원 외랑을 거처 선종4년(1087) 상서병부원외랑(尙書兵部員外郞)으로 각도에 파견되어 백성을 구제케 하였다. 이어 황주목부사(黃州牧副使)가 되여 청렴하고 부지런하게 백성을 보살폈으므로 임기가 만료되기 전인 숙종1년(1096) 상서우외랑(尙書右外郞)에 발탁 되었다. 이듬해 전내(典內)를 거처 숙종5년(1100) 급사중(給事中)이 되고 숙종9년(1104) 직문하(直門下)로서 서북행영병마사(西北行營兵馬使)에 임명되여 임간(林幹)과 함께 동여진(東女眞)의 침공을 막았으며 뒤이어 비서감지상서이부사(秘書監知尙書吏部事)를 거처 숙종10년(1105) 6월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고 예종2년(1107) 검교사공에 오르고 이듬해 예부상서(禮部尙書)로서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하였다. 예종4년(1109) 추밀원사(樞密院使)로서 평장사(平章事) 최홍사(崔弘嗣), 김경용(金景庸), 참지정사(參知政事) 임의(任懿)와 함께 윤관(尹瓘), 오연총(吳延寵), 임언(林彦)의 패전을 극론하였으며 이해에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였다. 이듬해 형부상서(刑部尙書) 중서시랑판호부사겸서경유수사(中書侍郞判戶部事兼西京留守使), 예종8년(1113) 수태위상주국(守太尉上柱國)에 오르고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예종11년(1116) 서경(西京) 행차 때 판행종사(判行從事)가 되어 수행하였고 이어 수태보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를 거처 태부(太傅)에 올라 계양군 개국백(桂陽君 開國伯)이 되고 인종1년(1123)에 계양백(桂陽伯)에 작을 받고 치사(致仕)하였다.인종5년(1125)네 중서령(中書令)을 더하고 계양공(桂陽公)이되여 진정공신(鎭定功臣)의 호를 내렸다. 나라에서는 식읍 이천오백호(食邑二千五百戶)에 식실봉 오백호(食實封五百戶)를 내렸다. 인종11년(1133) 9월에 별세하시니 85세이며 시호(諡號)는 장숙(莊肅)이다. 공(公)의 외손녀 임씨(任元敱의 딸)가 인종(仁宗)의 비(妃 :恭睿太后)가 되어 오형제를 두어 그중 세분이 毅宗. 明宗. 神宗 이시다.

《고려사절요에 나타난 공예태후(恭睿太后)에 관한 자료》

※ 예종3년○ 2월 급사중(給事中) 이자겸(李資謙)의 딸을 맞아들여 비로 삼았다. 자겸의 여동생은 순종(順宗)의 비가 되었는데, 순종이 훙(薨)하자 궁노(宮奴)와 간통하다가 일이 들통나자 자겸은 합문지후로서 연좌되어 내쫓겨났다.

※ 인종4년 6월○ 간관이 여러 번 소를 올려 아뢰기를, “이자겸의 두 딸은 주상께 이모가 되니, 주상과 배우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두 왕비를 내치고, 전중내급사 임 원애(任元敱)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으니, 비(妃)의 어머니는 이씨요, 문하시중 위(瑋)의 딸이다. 왕비가 탄생하던 날 저녁에 이위가, 누런 큰 기를 그 집 중문에 세웠는데 깃발이 바람에 날려 선경전(宣慶殿) 치미(鴟尾 궁전의 지붕 네 모서리에 다는 장식)쪽으로 휘날리는 꿈을 꾸었다. 왕비를 낳자, 이위가 특히 사랑하여 말하기를,“이 아이는 뒤에 반드시 선경전에서 놀것이다." 하였다.

시집갈 나이가 되어 평장사 김인규(金仁揆)의 아들 지효(之孝)와 정혼하였는데, 혼인날 저녁 지효가 문에 이르자 왕비가 별안간 병이 나서 거의 죽게 되어 모든 일을 사실대로 말하고 돌려보냈다. 다음날 병점을 쳤는데 점쟁이가 말하기를, “걱정하지 마시오. 이 처녀는 말할 수 없을 만큼 귀하게 될 것이니, 반드시 국모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당시에 이미 자겸의 두 딸을 왕비로 들여보낸 뒤라 자겸이 그 말을 듣고 미워하여 곧 상소하여 원애를 개성 부사로 좌천시켰다. 그리고 1년 후에 부사의 부관이, 부사가 있는 청사의 대들보가 벌어져 큰 구멍이 생기고 누런 용이 구멍에서 나오는 꿈을 꾸었다. 이튿날 아침에 그 부관이 조복을 갖추고 원애에게 나아가 지난밤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자세히 하며 하례하여 말하기를, “부사의 집에 반드시 특이한 경사가 있을 것이니, 공은 꼭 알아 두십시오." 하였다. 또 왕이 일찍이 깨 닷 되와 황규(黃葵) 서 되를 얻은 꿈을 꾸었다. 이를 척준경에게 말하니 준경이 대답하기를, “깨는 한자(漢字)로 임(荏)이요, 임(荏)은 임(任) 자와 음이 같으니, 임(任) 자 성을 가진 후비를 맞을 징조요, 그 수가 다섯이란것은 다섯 아들을 둘 상서입니다. 황(黃)은 황(皇)과 음이 같으니 임금의 황(皇)과 같은 뜻이고, 규(葵)란 것은 바로 규(揆)와 음이 같으니 도(道)로 다스린다는 의미의 규(揆)와 같고, 황규(黃葵)란 것은 임금이 도로써 나라를 다스릴 상서요, 그 수가 셋이 된 것은 다섯 아들 가운데 세 아들이 임금이 될 징조입니다." 하더니, 그 해몽이 과연 적중하였다.

※ 고려사절요 예종11년○6월 김경용(金景庸)을 수태사 낙랑후(守太師樂浪侯), 이위(李瑋)를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이자겸을 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판상서병부사에 제수했다.

이 순

(李 珣)

문하시중(門下侍中) 정공(靖恭)의 삼남으로 인종의 장인 문하시중 임원애(任元敱)의 매부로 벼슬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이며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배위는 계양부부인(桂陽府夫人) 정안임씨 부상주국정경공의(定安任氏父上柱國貞敬公懿)

 

  6세(六世)

이 장

(李 長)

공부시랑을 지내셨다.

 

  7세(七世)

이 찬

(李 贊)

전법총랑을 지내셨다.

 

  8세(八世)

이군옥

(李君玉)

호부시랑을 지내셨다.

 

  9세(九世)

이 의

(李 倚)

이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고려조에서 대대로 벼슬하여 온 세신가의 신하인 공을 나라에 출사 할 것을 여러 번 불렀으나 여조(麗朝)의 망국지한을 가슴에 안은 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산야에 둔적하여 나가지 않자 태조가 비록 죄를 내렸으나 그 절개를 가상히 여겨 관향에 속해있는 자연도(지금 인천의 영종도)로 유배하였다. 이때에 가산이 몰수되고 옛 가승과 고려시대의 사적이 모두 유실되어 입으로나 글로 써서 남김도 없어서 장숙공 이후의 몇 대가 끊어진 사적이 전하지 못하고 있으니 후손의 끝없는 슬픔이 아닐 수 없다. 귀양살이 하던 곳에서 스스로 자연거사(紫燕居士)라 하셨는데 상세한 고증을 밝힐 수 없으나 정승 이산해(李山海)가 자연공의 후손이 대를 이어 벼슬했다 증험했으니 이로 족하다. 생졸년 배위 묘소가 모두 전하지 못하고 묘소가 혹 계양에 있다고 전하며 귀양살이 하던 자연도에 자손들이 묘를 썼다하나 또한 고증할 수 없으니 더욱 통탄함을 금할 수 없다. 贈寺正이시다. 시정공께서 세 아드님을 두셨으니 장자는 매(枚)시고 둘째는 임(林)이시며 셋째는 예문관 직제학을 지내신 비(棐:초명은樛)이시다.

 

  10세(十世)

이규(李樛)

(初諱 棐)

시조공의 10세손으로 생원에 올라 1411년 신묘(태종11) 진사과에 급제하시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지내셨다.

 

  11세(十一世)

이극효

(李克孝)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5녀(세종17)을묘에 식년시 병과에 4등으로 합격하고 세종29년 정묘에 통진 현감이 되고 이해에 중시(重試)에 3등으로 급제하시어  봉직랑으로 성균관 직강(直講)에 오르시고 뒤이어 사예(司藝)를 지내셨다. 뒤에 공의 장자 휘 종호(宗顥)께서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올라 가선대부이조참판(嘉善大夫吏曹參判)에 증직되셨다.

 

  12세(十二世)

이종호

(李宗顥)

1447년(세종29)에 나시어 문종때 사마시에 오르시고 1469년(예종원년) 기축추장 갑과(己丑秋장甲科)에 급제하시고 호당(湖堂)에 들어가셨다. 성균관의 박사(博士)와 전적(典籍) 사예(司藝)을 거쳐서 1487년(성종18)에 사성(司成)에 올랐으며 다음해 1월에 평안도 경차관(敬差官)에 임명되어 국경지대의 군민을 단속하는 특수 임무와 민심을 살피고 돌아와 1489년(성종20) 8월에 통정대부 동부승지(通政大夫 同副承旨)에 오르셨다. 12월에 다시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서 이듬해 1월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임명되고 1490년(성종21) 7월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 1493년(성종24) 5월에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에 임명되고 이듬해 5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전라도 관찰사(全羅道 觀察使)가 되었다. 1494년 12월 24일 성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는데 바로 이날에 둘째 아드님 배근(培根)을 혼인시킨 죄로 파직되어 6년 동안이나 고초를 겪으시다 1500년(연산6) 8월 11일에 비로서 성균관 동지사(成均館同知事)로 대궐로 돌아왔다. 9월에 부총관(副總管)이 되시고 경기도 관찰사로 나가셨다 다시 예조참판이 되시고 1504년 9월에 한성부 우윤에 이어서 10월에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하셨다.

 

  13세(十三世)

이배근

(李培根)

자는 번중(蕃中)으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시고 곧 이어 1513년(중종8) 계유 식년문과(癸酉 式年文科)에 급제하시어 해남현감(海南縣監), 홍주목사(洪州牧使),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사도시정(司導寺正), 내자시정(內資寺正)을 지내시고 사재감 정(司宰監正)을 마지막으로 벼슬에서 물러나셨다. 배위는 하동정씨(河東鄭氏)로 봉사 권(權)의 따님이며 생졸년은 미상이다.

 

  14세(十四世)

이 유

(李 裕)

자는 중요(仲饒) 1549년 기유(명종4)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초계군수(草溪郡守)를 지내셨다.

 

  16세(十六世)

이계록

(李繼祿)

1582년 임오(선조15) 사마보침랑(司馬補寢郞)이 되시고 1591년 신묘(선조24) 식년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시여 탐화랑(探花郞)으로 직장(直長)에 제수되어 연안성(延安城)의 일을 맡으셨을 때 임진란을 만나 특별히 공을 세워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과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에 오르시고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셨다.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만사(輓詞)를 지어 올렸는데 『왕후께서는 임금을 돕는 덕은 능하셨으나 아내로서의 소매는 동서 소매의 능함만 못하였도다.』(坤元克配乾元德君袂不如娣袂良)중에 (娣袂良)석자가 선조께서 마음에 들지 않아 여러 번 고쳐 올리라 명이 있었으나 끝내 고치지 않아 미움을 받으셨다. 1602년 임인(선조35) 2월 2일 별세하시니 수는 65이시다. 나라에서 공이 돌아가신 후 특별히 가선대부 이조참판 양관 제학(嘉善大夫 吏曹參判 兩館 提學)을 내렸다. 공의 시문과 문적은 병자년 난리에 모두 불타버리고 다만 부자장부(夫子牆賦) 한편만 세상에 남겨졌는데 과거에 응시하는 선비가 만사 한 구절을 베껴두었다 전하여 후손들이 외우게 되었는데 글의 웅장한 기풍과 구법이 아름답고 법에 맞아 이 부(賦)와 이 시(詩)를 읽으면 그 밖에 것도 추축하여 가히 알 수 있다.

이계정

(李繼禎)

자는 숙유(叔綏) 1542년 임인(중종37)에 출생하시고 1567년 정묘(명종22) 진사시 합격하시고 1570년 경오(선조3) 문과에 오르시어 통훈대부 사도시정(通訓大夫 司䆃寺正)겸 춘추관 편수관(春秋館 編修官)을 지내셨다.

이계지

(李繼祉)

자는 계유(季綏) 1585년 을유(선조18) 사마시에 진사가 되시고 1603년 계묘(선조36) 문과에 급제하시어 조봉대부 장수현감(朝奉大夫 長水縣監)을 지내셨다.

 

  17세(十七世)

이덕일

(李德一)

자는 자정(子精) 1567년 정묘(명종22)에 태어나시어 1585년 기축(선조22)에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시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용만(龍灣:지금의 정주지방)으로 행차하는 왕의 행차를 호위하고 난리가 평정된 뒤 나라에서 제랑(齊郞)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으셨다. 1606년 병오(선조39) 문과 을과에 급제하시어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에 오르셨다. 문양부원군 유자신(文陽府院君 柳自新)의 첫쩨 사위이며 광해군(光海君)의 행실이 날로 어지러울 때 처가의 영화가 극에 달해 고향에 돌아가 문양에게 글을 보내고 발을 끊었다. 주위에 크고 작은 청탁이 들어오는 것을 피해 나라에 부탁하여 익산군수(益山郡守)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졸하시니 정승 동악 이안눌(政丞 東岳 李安訥)이 만사(輓詞)에 이르기를 「하늘은 우리나라의 운명을 어찌하려고 공의 나이 아직 늙지도 않았는데 불러가시오 밝은 햇빛 같은 이름은 광중밖에 걸려있는데 일만 백성의 바람은 조정안에 끊어졌구나! 군수를 맡아 몸을 보전함이 이것이 효가 되었고 조정의 기강을 떨치려 한 것이 다만 이것이 충이였소 초췌한 선비들이 함께 와서 조상하니 푸른 연못 가을 달이 그대의 고결한 인품을 생각게 하네. 」라는 글만 보아도 가히 공의 곧으심을 알 수 있다. 손자 휘 세익(世翊)이 귀하게 되어 도승지(都承旨)로 증직되셨다. 아버님 휘 계록(繼祿)께서 1591년 신묘(선조24) 식년문과에 3등으로 합격하신 이후 휘 홍재(弘載) 휘 상재(尙載) 휘 광재(光載) 세분의 아드님이 문과에 급제하시고 손자 휘 세익(世翊) 까지 4대에 걸쳐 다섯 분이 이어서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내셨다.

 

  18세(十八世)

이홍재

(李弘載)

자는 중거(重車) 1604년 갑진(선조37)에 나시고 진사시에 합격하여 세마(洗馬)가 되시고 1638년 무인(인조16)에 정시(庭試)에 급제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내셨다. 아드님 휘 세익(世翊)이 귀히 되시어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嘉善大夫 吏曹參判 兼同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 副摠管)에 증직되셨다.

※정랑공파의 중시조이시다.

이상재

(李尙載)

자는 문거(文擧) 1607년 정미(선조40)에 나시어 1630년 경오(인조8)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3년 계유(인조11)에 명경(明經)으로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저작(著作)에 임명되고 다음해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를 거쳐 1636년 병자(인조14) 8월 금정도 찰방(金井道察訪)으로 나가셨다. 이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청감사 정세규(忠淸監司 鄭世規)가 임금이 계시는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출정에 앞서 공의 활솜씨와 병법이 능함을 보고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광주 험천(廣州 險川) 전투에서 적의 엄습을 받아 군사가 산산이 흩어지니 공이 『신하가 임금을 위해 죽는 것이 직분이며 사나이 죽을 땅에서 죽을지언정 구차하게 살기를 도모하겠는가!』 라고 포효하며 앞장서 진격하니 도망치던 군사들이 차츰 모여들어 활을 쏘니 죽거나 다치는 자 많았으나 중과부족으로 순절하시니 이때 연치 27세이시다. 임금께서 특명으로 홍문관 교리 겸 경연 시독관(弘文館校理兼經筵侍讀官)으로 증직하고 뒤에 통정대부 홍문관 부제학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通政大夫弘文館 副堤學 知製敎 兼 經筵參贊官)으로 증직하고 정려(旌閭)를 내렸다. 공께서 승문원(承文院) 저작(著作)으로 계실 때 중국 사신 강학사가 공의 의젓한 용모와 당당한 기상을 존경하여 공의 시를 구해가서 황화집(皇華集:청국왕의 문집)에 실었다. 시(詩)의 원문은 공의 행장(行狀)에 있다.

※부제학공파 중시조이시다.

이광재

(李光載)

자는 계장(季章) 1609년 기유(광해1)에 나시어 1633년 계유(인조11)에 사마시에 합격하시고 1642년 임오(인조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正言)과 1648년(인조26)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지내시고 1652년(효종3)에 사은사 행열에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청국에 다녀와서 다시 사헌부에 들어가 장영(掌令)을 지내셨다. 뒤에 통정대부로 강계부사(通政大夫 江界府使)를 지내셨다. 1666년(현종7)에 졸하시니 향년 57세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