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중거(重車) 1604년 갑진(선조37)에 나시고 진사시에 합격하여 세마(洗馬)가 되시고 1638년(인조16) 무인정시(戊寅庭試)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오르시고 이어서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를 마지막으로 벼슬길에서 물러나셨다. 1654년(효종5)에 돌아가시니 51세이시다. 배위는 증정부인 김해허씨(贈貞夫人 金海許氏)로 부총관 정식(副摠管 廷式)의 따님이시다. 뒤에 아드님 휘 세익(世翊)이 귀히 되시어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嘉善大夫 吏曹參判 兼同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 副摠管)에 증직되셨다.

 

공의 조부 되시는 휘 이계록(李繼祿)께서 1591년 辛卯式年 甲科에 3등으로 급제하시어 탐화랑(探花郞)으로 벼슬길에 오르신 후 아버님 되시는 휘 이덕일(李德一) 도승지공께서 1585년(선조22)에 기축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시고 1606년(선조39)에 병오증광별(丙午增廣別) 乙科에 급제하셨다. 또한 공의 아우 되시는 휘 상재(尙載) 휘 광제(光載) 두 분이 계유식년 병과와 임오식년 을과로 급제하시어 삼형제 분이 나란히 벼슬길에 오르시고 아드님 휘 세익(世翊)께서도 庚寅卽位增廣 丙科로 급제하셨으니 四대에 이르러 모두 여섯 분이 대과에 급제하여 120여년에 걸쳐서 가문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증 이조참판이신 조부님의 묘는 경기도 개풍군 장단 선영에 잠들어 계시고 나머지 다섯 분이 인천광역시 연수구 선학동 정랑공 선영하에 잠들어 계시다. 지금은 도시계획으로 아파트와 신시가지가 선영 앞까지 들어섰으나 1980년말 까지 후손들이 선영하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고 인근에서는 집성촌을 가리켜서 능안말(陵앞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라 불렀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 없으나 선영 입구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었다.

 

正郞公諱李弘載의 墓域

소재지 : 인천광역시 연수구 선학동 산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