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0년 경술(현종11)에 태어나 처음 말을 배울 때에 이미 문자를 이해하고 다섯 살 때 당시(唐詩)를 배웠으며 이십 전에 이미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통달하였다. 경진 문과에 급제하여 1705년 시강원(侍講院) 사서(司書)로 재직 시 갑자기 임금께서 선위(禪位)의 명이 내리니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간하고 세자가 연하여 세 차례에 부당함에 상소를 올리게 하여 명을 거두게 했다. 암행어사(暗行御史)로 호남지방의 많은 민폐를 고쳤다.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을 거쳐 시강원(侍講院) 보덕(輔德)에 이어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충헌 김창집(金昌集)의 죄상을 논의하고 노론(老論) 축출에 가담했다가 노론의 집권으로 잠시 삭직되었다. 옥당(玉堂)에 들어 교리(校理) 응교(應敎)를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실록당상(實錄堂上)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 1722년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이어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재직 시 기자묘(箕子廟)를 세우고 기자궁구기비(箕子宮舊基碑)의 비문을 찬하고 배향케 하니 기자(箕子)의 후예들이 공의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1727년 도승지(都承旨)에 오르고 1728년 인량(麟亮)의 란(亂)을 평정하고 이듬해 대사헌(大司憲) 1731년 자헌대부 공조판서(資憲大夫工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어 우참찬(右參贊)으로 옮겼다.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이어 1734년 좌참찬(左參贊)과 호조판서(戶曹判書)로 국가의 재정을 굳건히 하였다. 임금의 특명으로 판금오(判金吾)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발탁되고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이어 예조판서(禮曹判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고 40년간 벼슬길에 있으면서 오직 청렴 강직하여 셋집에 살면서 돌아가실 때는 관사에서 운명하였다. 시호(諡號)는 효정(孝貞)이다. 정경부인 연일정씨(貞敬夫人延日鄭氏)는 공이 돌아가시자 22일간 단식 절명(絶命)하니 조정에서 열녀(烈女)의 정문(旌門)을 명하고 모친이 93세이므로 생전에 늠록(廩祿)을 주도록 왕이 특별히 명하였다.

 

孝貞公 戶曹判書 諱 李廷濟 墓

소재지 : 파주시 문산읍 선유4리 산89-4 (새능)